퍼슨웹     인터뷰




 
후지이 다케시(藤井たけし): 1972년 일본 미에 현 출생. 교토 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오사카 대학 대학원 일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성균관대학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현대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퍼슨웹은 후지이 다케시를 두 차례(2006년 8월 27일 / 2007년 1월 12일)에 걸쳐 인터뷰하였다. 첫 번째 인터뷰 참석자는 아래와 같고, 두 번째 인터뷰는 편집장이 진행하고 문수현이 옵서버로 부분 참여하였다. 후지이 다케시의 개인사에 대한 초반의 문답에서는 질문자를 ‘퍼슨웹’으로 통일하였고, 후반의 논의에서는 질문자 개인의 이름을 밝혔다. 본문에 삽입된 글과 인물 및 사건소개는 단행본(제목과 저자 및 역자, 출판사와 발행연도 명기)으로부터 인용하거나, 네이버(naver.com)와 인터넷 서점 알라딘(aladdin.co.kr)을 참조하였다. (편집자)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후지이 다케시 상을 모셨습니다. 퍼슨웹 북포럼에서 정희진 선생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할 때 후지이 상이 패널로 오셨잖아요. 그 때 사회자(공숙영)가 유학생이라고 소개하자, 본인은 자신을 실업자라고 소개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웃음) 사카이 나오키 교수의 책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번역과 주체』란 책도 내셨지요. 출생과 성장과정을 비롯하여 여기에 오기까지 본인의 개인사에 대해 먼저 쭉 이야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72년 3월생이고 시골에서 태어났어요. 가장 가까운 기차역에서 7km 거리 떨어져 있고 버스도 한 시간에 한 대만 다니는. 나고야 근처인데 미에라고. 아버지는 가구 만드는 회사에 다니다가 자영업을 했고 어머니는 유치원 선생님이었어요.

부모님의 신혼여행지가 한국여행이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생겼을 수도 있는데. (웃음) 시모노세키까지 자동차를 타고 가서 거기서 배로 가셨대요. 부산에서 서울까지 차 몰고 다녀오고. 그런 의미에서는 태어나기 전부터 인연이 있었고. 엄마 화장대에 십 원짜리 한국 동전이 있었던 게 기억이 나요.

시골이라 초등학교에 반 하나밖에 없어서 6년 동안 한 반으로 다녔죠. 중학교도 반이 3개 밖에 안 생기더라고요. 그 정도로 사람이 없었어요. 공부는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었고. 초등학교 때 성적표 보면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잘 하는데 자기가 관심이 없는 분야에서는 전혀 안 한다고. (웃음)

뭘 좋아하는 아이였나요?

곤충을 좋아했어요. 곤충 도감 보고 실제로 시골이니까 많이 잡기도 하고. 책도 많이 봤어요.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역사를 좋아했지요. 그리고 달리기를 잘했어요. 단거리는 아니고 장거리. 초등학교 때 반에서 5등을 했나. 근데 그때까지 자기가 특별히 잘할 수 있는 게 있다고는 생각을 안했어요. 아, 이건 잘할 수 있겠다는 것.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나는 달리기를 잘한다, 이게 나의 정체성이다, 라고 생각하고 커서 희망은 국제 마라톤에 나간다, 그런 거였죠.

애니메이션은 좋아했어요?

중학교 때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 바람계곡의 소녀 나우시카가 환경오염으로 황폐해진 지구를 구원하는 내용의 일본 만화영화 /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1984)를 봤어요. 그 때부터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을 다시 보게 됐죠. 애니메이션 잡지도 사보고. 그래서 일단 미야자키 하야오. 대학 가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졸업했어요. 나우시카 보면, 구세주가 나타나서 세계를 구원해 준다는 건데, 그러니깐 아주 순진하게 인민과 자연이라는 것을 믿죠. 구좌파 같은 느낌이 나잖아요. 대학 가서는 오시이 마모루(- 미래의 가상국가를 다룬 일본 만화영화 [공각기동대](1995)의 감독)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70년대 작가. 그래서 삐딱하게 세상을 보기 시작했고.

유년기를 시골에서 보냈군요. 고등학교 때도 계속 그 지역에 살았습니까?

거기서 계속 살았죠. 고등학교는 26km 정도. 멀었어요. 기차 타고 자전거 타고 왔다 갔다 했어요. 운동이 되었어요.

그 지역에 특정한 정치성은 있었어요?

시골이니깐 자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많았어요. 근데 아버지는 사회당 지지했고 어머니도 사회당 지지했고 일본 공산당 신문을 집에서 봤고.

아버지는 전공투 세대인 45년생입니다. 집이 가난해서 대학을 못 갔는데 대학을 갔다면 아마 운동했었을 거예요. 어느 정도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약간의 영향을 받았지요. 그렇게 구체적인 계기는 없었는데 이상하게 우익들은 싫어했어요. 일단 우익들이 하는 소리는 너무 바보 같고.

이제껏 진로를 결정하면서 부모님이 반대하시거나 그런 적은 없으셨나요? 한국 오시는 것도 포함해서.

부모님이 문제된 적은 없었어요. 저에게 맡겨 두시는 편이거든요.



교토(京都)대로 진학하죠. 그럼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대학 가서 학생 운동 하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운동에 대한 관심은 고 3때부터 생겼거든요. 60년 안보투쟁에 대한 책을 읽고 감동 받으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요.


안보투쟁은 1960년 미일상호방위조약 개정에 반대하여 일어난 시민 주도의 대규모 평화운동을 말한다. 당시 안보투쟁에는 시민들 외에도 평화운동에 참여하던 일본 기독교와 사회당(現 사회민주당)과 일본 공산당도 참여하였다.


1990년에 대학 입학한 거죠? 90학번인데 당시 일본에 학생운동이라고 할 만한 게 있었나요?

한국은 90년대에도 학생운동이 활발한 편이었지만, 일본은 학생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어요. 총학생회가 명의상 있는데 같은 사람이 총학생회장을 4~5년 동안 하고 그랬거든요. 아무도 안하니까. 그래도 대학 당국과 교섭은 해야 하니깐 학생회가 있기는 했어요. 하려는 사람은 없지만.

그럼 일본의 학생운동은 어떤 식으로 조직이 되고 운영이 되었나요?

한국에서는 학생회가 운동의 중심이잖아요. 일본은 거의 서클적인 조직이에요. 거기서 개별적인 과제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큰 사건이 있다. 예를 들면 걸프전이 터졌다 그러면 따로 조직을 만들어요.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그럼 계속 더 들어보지요.

대학 들어가기 전 전공투에 관한 책을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대학 들어가서 헌책방을 다니며 전공투에 관한 책을 찾아 읽었어요. 그 영향을 되게 많이 받았어요. 특히 전공투가 매력적이었던 게 자율적인 운동이었잖아요. 대학이라는 공간 내부에서 외부의 권력에 대해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어떻게 보면 지식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특히 동경대 전공투가 대표적인 위치에 있었죠.

전공투란 잘 알려진 대로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일본의 새로운 학생운동 세력이었다. (……) 그 운동의 전개와 의미가 학생운동이라는 틀로 국한될 수 없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 중요성은 이들이 내세운 ‘자기부정의 논리’에 집약되어 있다.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이들의 행동강령은 이 논리가 육화되는 방식이었고 말이다.

- 미시마 유키오 외,『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부제: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김항 옮김, 새물결, 2006, 역자 서문에서

동경대 전공투의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는 실제 전공투를 안 했으면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을 거라는 말도 있어요. 실제로 그 사람이 쓴 물리 책도 여러 권 있는데 지금 대입학원에서 강사를 하거든요. 강의가 대단하다는 평이 있죠.

이 사람이 쓴 『지성의 반란』이라는 책이 있어요. 동경대 투쟁 과정에서 쓴 건데 그걸 보면서 좋았던 게, 동경대 투쟁을 통해서 세계혁명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런 식으로 나올 것 같잖아요. 그런데 전혀 그런 식이 아니고, 전공투 투쟁이 끝나면 나는 다시 물리학도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
1941년 출생. 1964년 도쿄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 석사를 거쳐 박사과정에 재학하던 중, 일본인 최초 노벨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 선생의 부름을 받고 교토대학으로 옮겨 소립자 물리학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차세대 노벨상 수상자'로 불리기도 했다. 60년대 말 도쿄대 전공투 운동을 하면서 학생운동의 한가운데에 섰고, 1969년에는 “평범하지만 자각한 인간이 되어 한 사람의 물리학도로서 생을 살아가고 싶다”는 글과 함께 대학을 떠났다. 이후 대입학원에서 물리를 가르치며 여러 권의 물리학 관련 저서와 번역서를 냈고, 20여 년의 노력 끝에 『과학의 탄생』을 썼다. 이 책으로 마이니치 출판상 등 여러 상을 받았다.

학생 운동 인자가 전체 학생 중에서 극소수였을 것 같은데, 내부에서 강한 연대감 같은 건 있었나요?

소수이긴 하지만 내부에서 자꾸 싸우고 그러지요.

엘리트 의식 같은 건?

초기엔 있었어요.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우익들은 바보니깐 그런 거라고 생각했고. 안 그러면 천황이 신이라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요.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극소수라는 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을 안 하는 거지요. 운동이라는 게 대안을 제시하거나 희망을 보여줄 수 있을 때만 사람들이 반응하잖아요. 운동이 그렇게 하지는 못했어요. 물론 반대한다, 그런 건 좋은데 그렇다고 그것이 대부분 학생들에게 위기 상황으로 느껴지지는 않으니까요. 천황이 있거나 말거나. 자기 생활은 있는 대로 굴러가는 거고. 그렇다면 굳이 반대 같은 거 할 필요도 없을 거고.

일반적인 교토대 인문대 학생들의 행태나 관심은 어떻게 되나요?

실제 대학 들어가면 공부 별로 안 해요. 동기 집에 놀러갔는데 책장이 없더라고요. 책이 없고. 연애는 하는데 다른 건 뭘 하는지 잘 모르지요.

근데 교토대가 아주 좋았던 게 좋은 교수들이 많았어요. 교토대 전공투 투쟁 때 직접 관여했던 사람도 있고, 투쟁의 일환으로 바리케이드 안에서 맑스를 가지고 수업하고 그랬던 사람들이 아직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컸어요. 그래서 대학 1학년 때부터 발터 벤야민에 대해 알게 되고 벤야민의 저작을 읽었고요. 그런 교수들을 못 만났다면 무식한 운동권이 되었을 텐데.

선배들의 영향력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어요.

어떤 서클에서 어떤 운동을 하셨어요?

어떤 특정한 서클에 소속되어 운동했다기보다는 ‘스케쥴 투쟁’이라고 해서 그때그때 이슈별 투쟁에 참가했어요. 89년에 히로히토 천황이 죽고 아키히토 천황이 즉위하면서 천황제 반대 투쟁이 크게 벌어졌고. 91년에 걸프전이 터지면서 관련 투쟁이 있었고 92년에는 캄보디아 파병 저지가 가장 큰 이슈였어요. 그 때부터 여론 분위기가 달라졌고요. 자위대의 존재 자체가 위헌이냐 아니냐를 얘기했었는데 걸프전 겪고 나니까 자위대를 파병할 거냐 말 것이냐, 로 간 거죠. 자위대가 있는 건 당연한 게 되었고.

운동 진영에서 캄보디아 파병 저지 주장을 했고, 정부에서는 캄보디아 파병으로 일본이 국제적으로 공헌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어요. 캄보디아 파병 문제가 전국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는데 결국 캄보디아 파병이 이루어지면서 투쟁은 지고 만 셈이 되었어요. 어쨌든 지고 나니까 우리한테 뭐가 부족했을까 심각하게 반성했지요. 구호로는 국제공헌이 아니라 국제연대다, 이런 걸 얘기했는데, 사실 말은 연대라고 하는데 실속이 없잖아요. 실제로는 연대라는 것이 아무래도 구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는 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국제 연대라는 걸 실제로 만들어가야겠다, 그런 의지를 굳게 가지게 되었어요.

그런데 제국주의국가 내부에서 운동하는 어려움이라는 게 여기에 있어요. ‘일본’이나 ‘일본인’이라는 단위로 생각을 하면 국민의 이익을 내세우는 ‘국제공헌론’에 맞설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국제연대라는 것은 ‘일본/일본인’과는 좀 다른 기반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다면 먼저 일본인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 어떻게 그런 의식을 바꿀 수 있을까, 국제주의적이라는 사고방식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했어요.

그러면 재일조선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국제 연대라 하면 팔레스타인에 간다든가 그런 이미지가 있는데, 실제로는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재일조선인은 금방 만날 수 있어요. 바로 옆에 사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그런 운동을 하게 되었죠. 92년의 일인데, 또 그 때 한국에서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도 있었어요. 그때 교토에“일한민중연대 교토연락회의”라는 조직이 있었어요. 80년대 말부터 한국 노동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단체가 일본에도 많이 생겼는데 교토 지역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요. 한국의 노동운동가를 초청하기도 하고 찾아가기도 하면서 교류를 하는 모임이었는데 거기 관여를 하게 되었어요. 당시 일본에 온 사람이 오두희라고 지금 대추리에서 일하는 분입니다. 그 사람을 만난 게 개인적으로는 컸어요. 그러니깐 관념적인 연대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현실 정치권과의 교류는 없었어요?

제도권과는 전혀 무관해요. 일본에서는 선거를 통해서 뭔가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안 해요. 찍을 만한 정당이 없으니까. 사회당이나 공산당에 대해서 전혀 희망을 가질 수 없고. 특히나 일본에서는 국제적인 이슈를 생각해야 하는데 일본 공산당 같은 경우는 국내 이슈밖에 생각 안 해요. 파병 반대도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 밖에 없어요. 국민조직이죠. 사회당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괜찮은 사람은 많았어요. 투표할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사회당이나 공산당을 찍기는 찍었는데.

다른 일반인들이 살아가는 패턴으로부터의 단절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어요?

별로 없었어요. 그렇다고 친구들을 못 만나는 것도 아니고. 운동권에 있으면 운동권 이외에는 안 만나게 되는 것 같은데 저는 안 그랬거든요. 친구들하고 놀았고.

교토대 사학과 나온 친구들은 뭐해요? 직업적으로.

제가 대학원은 딴 데로 갔잖아요. 대부분은 대학원은 안 갔고. 두세 명 정도 대학원 가고 나머지는 다 취직한 것 같아요. 처음부터 사학과 가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어요. 처음에 역사공부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선택지가 몇 개는 있었어요. 사학과나 독문과 아니면 미학과. 벤야민과 브레히트를 좋아해서.

근데 그런 거 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교양학부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있는데. 그래서 포기하고 사학과 갔어요. 특히 좋았던 게 사학과 안에 현대사 전공이 있었어요. 사학과 안에 동양사, 서양사, 일본사처럼 지역별로 구분되는 전공이 있고, 현대사처럼 시대별 전공도 있어요. 재미있잖아요. 그래서 현대사 전공을 했죠. 일본 현대사만 하는 게 아니거든요. 일반적으로 근대는 자본주의 시대고 사회주의 체제 성립 이후부터 현대라고 구분할 수 있잖아요. 무엇보다도 거기 가면 좋은 게 고문서를 안 봐도 돼요. (웃음)

현대사 전공을 정한 게 그럼 언제인가요?

3학년 올라갈 때 정해요. 근데 수업을 잘 안 들었기 때문에 별로 의미는 없었어요. (웃음) 수업을 제대로 들은 게 1학년 때 외에는 없거든요.

그럼 독서는 어떤 식으로 했어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1, 2학년 때는 전공투 관련된 걸 일단 많이 했어요. 전공투가 제게는 아주 중요했어요. 그래서 어떤 주어진 이슈로만 사고하는 방식에서 벗어났지요. 자기 자신이 거기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는 거예요. 또한 그런 공동체에 대한 동경 같은 걸 갖게 되었어요. 독문학도 좋아했고. 한 3학년 때 쯤부터 맑스도 읽게 됐고. 책으로 영향 많이 받은 사람이 교토대의 노무라 오사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사람이 벤야민을 많이 번역했어요.

전공투에 대한 본인의 애정을 다른 친구들하고는 공유할 수 있었나요?

나름대로.

맑스를 함께 학습할 수 있는 기회가 있나요?

아니오. 혼자서 읽었어요.

그럼 92년 이후의 삶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다시 들어 볼까요?

그래서 92년 쯤 큰 전환이 있었고, 재일조선인과 같이 운동했고. 그리고 한국과의 교류. 93년에 처음 한국에 왔어요.

다 혼자서 한 거예요?

다른 친구들도 스케쥴 투쟁만 하다 보니깐 지치게 되었어요. 나름대로의 운동 영역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친구들은 일본의 요세바라고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들어가서 운동을 하기도 했고. 그렇다면 나는 뭘 할까, 아무래도 자기가 꾸준히 하는 뭔가가 없으면 그때그때 반대한다고 해 봤자 근거가 될 만한 게 없잖아요. 그래서 그때 한국에 와서 주로 노조 사람들 만나고 한총련 간부도 만났는데 근데 그때 놀란 게, 연세대에 갔어요. 거기 총학생회실 들어가니까 컴퓨터도 있고 놀라웠어요. 일본 같은 경우 제가 있던 교토대 학생회에는 돈이 없어서 컴퓨터도 없었고, 그래서 너무 놀랐어요. 학생운동이라는 걸 이런 식으로 할 수도 있구나. 저에게는 학생운동이란 가난하고 수공업적인 것이란 이미지 밖에 없었거든요.

들어보니까 일본은 개인주의, 서클주의라 하면 우리는 집단주의, 조직적으로 학생운동을 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서클주의적인 게 나름대로 좋기도 했고요.

말씀 들으면 부러운 점도 있어요. 시대적 상황이 달랐으니 무조건 비교할 순 없지만, 개인의 지향을 스스로 만들어 나갔다는 점에서. 우리는 많은 부분 조직에 의지했던 것 같아요.

 


제가 태어난 72년 초에 발생한 연합적군 사건 때 죽은 사람의 일기가 책으로 나온 게 있는데 그걸 읽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 일기의 주인공이 무장 투쟁에 회의를 가졌는데, 선배가 와서 설득 당했어요. 그 날 일기를 보면 딱 이렇게 적혀 있어요. “논파되었다, 할 수밖에 없겠다.”너무 무섭더라고요.

결국 그 사람도 무장 투쟁 과정 중에 죽어요. 그래서 제 결론은, 아무리 논파되더라도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된다, 하면 안 된다. 그러니깐 운동이라는 건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논리적으로 설득 당했다고 해서 그게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조직을 못하는 운동가가 됐는데. 그걸 못하게 됐어요.

그래서 사람들과 항상 느슨하게 관계를 가지게 되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무책임한 운동이 되죠. 인간관계로만 돌아가니까. 그런데 그 일기를 읽고 받은 공포라고나 할까요? 그 글이 전달한 공포. 그건 몸에 아직도 박혀 있어요.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연합적군(聯合赤軍): 1971년에 ‘공산주의 동맹’의 가장 과격한 분파인 적군파와 ‘게이힌(京濱) 안보 공투’가 무장투쟁을 목표로 결성한 군사혁명조직. 혁명이론의 불일치에는 신경 쓰지 않고 ‘총이 당을 만든다’는 슬로건 하에 산악캠프를 바탕으로 군사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경찰에게 캠프가 발각된 후 아사마 산장에서 총격전이 일어나 캠프가 해체되었고 이후 조직 강령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14명(이전의 2명을 포함해 총 16명)의 동지를 살해했다. 연합적군의 아사마 산장 사건은 일본 좌파운동의 몰락을 상징하며, 전공투 세대의 사상적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 미시마 유키오 외,『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부제: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김항 옮김, 새물결, 2006, p.193

연합적군의 린치 사건이란 1972년에 일어난 것으로, 깊은 산 속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도중, 혁명 완수를 위한 인간형에 다다르지 못한 동지를 집단 린치를 통해 살해한 사건이었다. 매일 밤 ‘총괄’을 통한 자기반성, 그리고 훈련 지휘자의 감시와 처벌에 의해 린치의 대상이 결정되었고, 그 대상은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스스로를 지양하지 못했음을 시인한 뒤 잔인한 폭력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 위의 책, 역자 서문에서

            

그때부터 한국어도 배우기 시작했어요. 기초를 하고 혼자서 책을 읽었어요. 역사책을 봤고,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책들 몇 개 봤어요. 졸업논문을 쓸 때에도 실제로 한국 책을 보고. 학교에서 현대사 전공이긴 했지만 한국에 대해 학문적으로 공부할 생각은 별로 없었거든요. 그렇지만 운동을 계속 재일조선인과 한국과 관련된 것을 하니까 공부도 같이 해볼까 해서, 공부도 한국사를 하게 되었어요.

그럼 학사논문부터 한국 현대사에 대해 쓰신 건가요? 뭘 쓰셨어요?

경성제대에 대해서 썼어요. 처음에는 식민지 시대의 재조선일본인에 대한 관심이 생겼어요. 그 사람들의 심성이라는 게 어떤 것이었을까. 일본인들이 억압을 하고 수탈을 하고 있잖아요. 그렇지만 외면하지요. 그런 관계를 부인하면서 살고 있는데 그런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일본인들이죠. 알면서도 부인하는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지식생산을 했던 경성제대 사람들에 대해 썼어요.

경성제대 반제동맹 사건이라고 있었는데 일본인과 조선인이 반제동맹을 같이 했거든요. 실제로 한 건 별거 아닌데 그래도 중요한 게 일본인과 조선인이 같이 했다는 것. 일본인이 주도했어요. 어떤 책에 의하면 이치카와(市川朝彦)라는 일본인이 왜 이런 운동을 하느냐는 질문에, 내가 지금 조선에 와 있다, 여기에 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한국어도 배웠다고 하고요. 옆에 있는 한국인들을 직시하고 실제로 관계를 만들어 낸 사람들도 있었다는 걸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러니까 경성제대 반제동맹의 일본인들의 문제의식은 일본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거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런 틀을 강화시키잖아요? 자기를 지켜야 하니까.

그럼 대학 4학년은 전반적으로 어떻게 지내셨어요?

저 5학년까지 다녔는데요. (웃음) 일본 운동권이 좋은 게, 뭐 운동권뿐이 아니지만 일단은 나이를 안 따져요. 선배다, 형이다, 안 따지고.

한국은 따지죠. (웃음)

근데 저도 그런 게 몸에 배었어요. 일본에 가서도 나이 물어보고. (웃음)

재일조선인과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은데요.

전후보상을 요구하는 서명운동 같은 것도 하고 그랬는데, 재일조선인 조직이 몇 개 있어요. 재일한국학생동맹이란 데가 있는데 원래는 민단계열로 있다가 유신체제에 반대하고 된 민단의 민주화, 한국의 민주화를 목표로 삼게 된 조직이에요. 그런 사람들과 일본인 학생들이 같이 하는 조직 같은 게 있었어요. 거기서도 같이 하고.

재일조선인 문학도 많이 보게 되었는데 특히 김시종이란 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김시종이 전후 30여 년간 재일조선인은 양심적인 일본인의 거울에 불과했다고 했거든요. 재일조선인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양심적인 일본인인가, 비양심적인 일본인인가 판정을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떠한 연대나 관계는 없었다는 지적을 했어요. 저도 찔리는 부분이 있었어요. 저에게도 재일조선인이 그 정도에 불과하지 않을까, 거울 정도.

제가 졸업논문 준비하다가 어느 친구 아버지를 만났는데 그 분이 문세광(-재일조선인,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암살범)의 형이거든요. 그러니까 제 친구가 문세광 조카예요.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재일조선인 문제로 논문을 쓴다니까 조선을 리트머스 시험지로 쓰는군, 하더라고요.

그렇다면 그런 관계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고민을 계속 하게 되었어요. 어떤 면에서는 상대방을 착취하는 거잖아요. 그냥 거울로만 이용을 하는 거면. 그런 건 결국 진정한 연대라고 할 수 없고. 거기서 벗어나려면 일본인이라든가 조선인이라는 틀을 깨버려야 한다, 그걸 유지하고는 안 되는 거지요.

어떻게 깨요?

그거야말로 인식론의 문제인데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동서양이라는 걸 없애야 한다고 말하고 있듯이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라는 지표는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잖아요. 구체적인 실체를 가리키고 있다기보다는.

그런 고민을 하게 되었을 때 사카이 나오키가 쓴 것을 만났어요. 95년도에 나온 건데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어요. [사산되는 일본어·일본인]. 공부를 안 해서 그 때는 무슨 소린지도 잘 몰랐지만.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주 중요한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한 고민과 비슷한 고민, 어떻게 하면 우리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일본인이라든가 한국인으로 고정되는 게 아니라 그런 틀을 넘어서 어떻게 우리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그런 고민.

 

*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
도쿄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잠시 영국 회사에 입사해 런던에서 일했다. 공부를 결심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뒤, 일본의 여러 대학에 '후기 구조주의와 현대 일본사상'이라는 연구 주제를 제출하였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미국의 시카고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코넬대에서 아시아연구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다언어 잡지'흔적(Trace)'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1991) (1997), 임지현과의 대담집 <오만과 편견> 등이 있다.

이 글들을 여러분 앞에 내놓다는 생각은 나를 겁나게 하면서도 흥분시킨다. 여러분과 나의 관계가 이전과 같은 국제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나 일본인으로 처신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엄밀히 말해 종족과 인종, 민족 정체성은 원해서 선택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나는 사실 가능하면 일본인으로 처신해야 하는 상황을 피해온 터다. 그러나 이따금 일본인으로 행동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역사적 이유로 불가피한 때가 그러하다. 이 책에서 살펴보는 역사적 이유들이 이 순간도 그런 경우로 만든다. 나는 여기서 아직도 동아시아와 미국을 지배하는 식민지 관계의 구조를 밝히기 위해 나 자신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말을 거는 일본인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여러분께 말을 걸며 나는 마치 한국 국민에 대한 일본 혹은 미국 국민의 위치와 관련된 나의 거북하고 부끄러운 생각을 모두 극복이라도 한 듯 이 더러운 역사들을 초월한 어떤 결백한 지위를 누린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 국민의 위치를 지지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이 종족적, 민족적 지위를 해산하고 여러분과 나의 관계에서 내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갈수록 덜 중요하게 만들기 위해 나 자신을 일본인으로 내세운다.

- 사카이 나오키,『사산되는 일본어·일본인』, 이득재 옮김, 문화과학사, 2003, 한국어판 서문에서

 

95년이면 대학원에 가셔서인가요?

제가 바로 대학원 들어가지 않고 졸업하고 2년 정도 후에 갔어요. 사실 졸업논문 쓸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논문 내면 바로 대학원 시험인데 논문도 못 썼어요. 제출이 1월 11일 경이었는데, 12월 31일까지 한 자도 못 썼어요. 자료 준비해서 대충 머릿속에는 있는데 못 쓰겠더라고요.

바로 1월 1일 집에서 결심했어요. 그 때 친구들이랑 같이 살았는데, 연말이라 딴 친구들 다 나가고 혼자 집에 있었어요. 새벽에 샤워를 했나 그러고 나서 대학원 가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대학원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편해졌어요. 논문도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된다고 마음먹고. 그리고 열흘 만에 썼어요.

그럼 5학년 후반기 때 대학원 가려고 생각했겠네요.

네. 대학원은 당연히 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운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으니까 취직을 하면 그러기 어려우니까 그냥 막연하지만 자연스럽게. 대학 졸업 직후 아르바이트하고 운동하면서 지냈는데, 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한 1년 정도 지나니깐 아닌 것 같더라고요.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가 없잖아요. 누구하고 토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자리가 없으니깐 그리고 소속이 없으니까 정보량 같은 게 전혀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대학원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대학원 석사과정 들어가신 게 97년이겠고, 대학원을 교토가 아니라 오사카로 가셨네요. 교토에서 대학원 진학 안 하고 오사카로 가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교토대 선배 중에 사키야마라고 라틴아메리카 연구를 한 사람과 어디 가는 게 좋을까 상의했더니 오사카대 일본학과 가라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도미야마 교수가 그리 오는 걸 사키야마가 알고 있었어요.

『전장의 기억』 쓰신 도미야마 교수요?

네. 맞아요. 그 책, 제가 추천해서 번역된 건데요. 이산출판사에서 낸 것 중 두 번째로 잘 안 팔린다더군요. (웃음)

*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郞)
1957년 일본 교토(京都) 시에서 태어났다. 교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베(神戶) 외국어대학을 거쳐, 현재 오사카(大阪) 대학 일본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에 『근대 일본사회와 '오키나와인': '일본인'이 된다는 것』과 『폭력의 예감』, 『전장의 기억』 등이 있다.

 

도미야마 교수가 어떤 분인지 간단하게 소개해 주세요.

도미야마도 교토 사람인데요. 오사카 가기 전에는 고베 외국어대에 있었는데 먼데도 교토에서 계속 다녔어요.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대중적인 사람은 아니고요. 그러니까 오키나와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알아요. 『전장의 기억』은 1995년 8월 15일, 전후 50년 되는 바로 그 날에 낸 건데. 기억의 내전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역사 수정주의에 기반한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등장하고, 바로 그랬던 시기거든요.

그 전부터 도미야마가 쓴 걸 읽긴 했어요.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근대 일본사회와 오키나와인』도 재밌게 읽었고, 『전장의 기억』도. 일상적으로 보면 둔한 사람이에요. 나사가 몇 개 빠진 게 아닌가 싶게. (웃음) 원고를 봐도 조사가 꼭 몇 개씩 빠지고. 또 한자에 약해요. 기억나는 일화를 하나만 들면, 수업을 하는데 어떤 한자를 못 써서 조교한테 부탁해서 쓰게 했지요. 泥 자를 쓰려고 하는데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난감하지요. 웃긴 일화를 이야기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날카로워요. 언어 감각이 놀라울 정도로. 힘이 존재한다고 할까 문장 강도라는 게 읽혀요.

일본학과, 우리로 치면 한국학과네요.

네. 웃긴 건 일본학과라고 하면서 일본 연구하는 사람이 없어요. (웃음) 오사카대 일본학과는 나카소네 수상 때 만든 건데. 원래 우익 국가주의자들이 만들어서 이상하게 좌파의 소굴이 됐어요.

대학원 가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열심히는 안했고요. 거주지를 오사카로 옮기지는 않았고 계속 교토에 살았어요. 멀어서 더 안 가게 되었어요. 94년부터인가 친구들이랑 셋이서 집 빌려서 같이 살았거든요.

같이 산 친구들의 경향도 비슷했어요?

비슷한 친구들이었는데 그 친구들은 이과대였어요. 생물학과, 물리학과. 기본적으로 학생회장 집이었어요. 저는 문과대 학생회장을 지냈고 친구 둘도 이과대 학생회장을 지냈어요. 한 애는 연극을 했고요. 방이 세 개였는데 개인 방은 안 만들었어요. 그런 좋은 환경에서 사니까 옮기고 싶지 않았어요. 실제로 대학 관계자들은 교토에 살게 되면 못 떠나요. 너무 좋아서.


그 집이 당시 교토대 학생회의 산실이네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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